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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조국, 타국에서 피땀흘렸던 그들의 기록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빼앗긴 들에도 결국 봄은 찾아왔고, 7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날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이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제의 핍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앞장서 싸웠다면, 그 뒤에는 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한인들이 있었다. 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만큼은 더없이 간절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미주의 독립투사들. 오늘은 그들의 행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 뉴욕한인교회 맨해튼 115스트리트에는 당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미주 한인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공간이 있다. 바로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로 사용됐던 뉴욕한인교회다. 1921년 3월 2일 맨해튼 웨스트 43스트리트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서재필 박사를 필두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대회 개최를 계기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뉴욕한인교회가 탄생했다. 뉴욕은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들이 많지 않았지만, 국제사회에 한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주요 도시였기에 이승만·서재필·안창호 등 뉴욕한인교회의 문턱을 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라를 잃고 해외살이를 하는 동포들은 이곳에 모여 서로의 향수를 달래고 독립정신을 북돋아주며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살구 농장에서 생긴 일   1910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본은 해외에 사는 한인들까지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은 1913년 6월 뉴욕의 살구농장에서 드러났다. 당시 살구 따는 일을 하러 갔던 100여명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주민들의 배척을 받았다. 당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배일사상(일본인 배척 사상)이 팽배했는데,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영사는 한인들을 찾아가 미국정부와 교섭해 배상금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한인들은 분노하며 해외 한인들까지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통보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당시 유일한 해외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일본의 음모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항의했고, 이에 국무부는 “한인은 일인이 아니며, 이제부터 재미한인과 관련된 일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교섭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뉴욕에서는 ▶18명의 한인들이 규합해 결성된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신한회’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 뉴욕지부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등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독립 염원을 외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는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미주의 한인들도 전세계에 독립 염원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14일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한인들은 서재필 박사의 주도하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를 폭로하고, 한인의 자유 독립 의지를 담은 결의문과 호소문을 미국 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뉴욕에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했는데, 1921년 3월 2일 맨해튼 타운홀에서 개최된 제2주년 기념식에는 100여명의 한인들과 1200여명의 친한파 미국인들이 비를 뚫고 참석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   1945년 8월 15일, 뉴욕에 울려퍼진 뜨거운 함성     피 같은 돈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3·1운동 후 10년간 18만불 전달   조국 독립 위해 미군 자원하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들의 모금 운동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했다.     나라를 뺏기고 타지에서 생활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같은 돈을 내놨다. 기록에 따르면 미주 한인들은 3·1운동 이후 10년 동안 약 18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바쳤다. 10년 넘게 뉴욕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온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전 담임목사는 “당시 뉴욕 한인들의 유일한 소원은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의 뉴욕 도착   1932년 3월호 〈Korean Student Bulletin〉(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된 북미유학생총회가 미국에서 발간한 영문잡지) 1면에는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컬럼비아대학에서 뉴욕 한인들과 찍은 사진이 실렸다. 이승만이 뉴욕에 온 것은 미국 NBC방송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연설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자 이승만은 위협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시 뉴욕시경(NYPD) 커미셔너가 이승만의 신변을 염려한 나머지 형사 2명을 파견해 이승만을 보호할 정도였다. 2분 남짓한 연설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 자행해 온 갖가지 불법행위를 밝혔다. 〈K.S.B〉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전역으로부터 방송국으로 온 축하편지가 홍수를 이룰 만큼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이후에도 이 박사는 뉴욕에 머물며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규약 16조에 있는 대로 경제적인 보이콧을 할 것”을 역설했다.    ◆실낱같은 희망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처음으로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자 한인들은 1942년 2월 워싱턴에서 ‘한인자유궐기대회’를 열고 미국 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유엔가입을 도와줄 것 등 5개항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은 이때 연설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적인 이상 한인들이 미국을 도와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미주의 한인들은 이미 이전에 미국을 지원하는 뜻으로 6만 달러에 달하는 방위채권을 샀다. 젊은 한인들은 자원해서 미군에 지원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총 110명으로 구성된 한국인 예비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동단결한 여성들   정치 문제는 남성에게 일임하는 것이 상례였던 시대였지만, 뉴욕의 여성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과감히 나섰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의 여성들은 ‘미주동부대한부인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주말마다 한복을 입고 뉴욕의 중심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모금운동을 했고, 그 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기도 하고, 뉴욕 지역에서 미군으로 출전한 한국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날   1945년 8월 15일, 뉴욕에서도 뜨거운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는 “마침내 그날이 오자 뉴욕시는 사방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종일 요란했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의 날이 왔음을 고하는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뉴욕 시민들의 고막을 울렸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뉴욕중앙일보는 1920~1950년대 뉴욕한인교회 교인명부를 통해서 동부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뉴욕한인교회 60·70년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가나다 순)     김경(상해임시정부에 재정 보조)     김도연(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에 모여 독립선언 논의)   김마리아(뉴욕에서 한인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조직. 악랄한 일본 식민정책 미국에 알림)     김준성(뉴욕한인교회 목사로 일하며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후원에 큰 역할)     김헌식(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김형린(뉴욕 조국광복사업추진회 회장)     박용만(한인 대표해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참석한 독립운동가)   박인덕(1919년 3·1운동시 학생들 선동. 미국 돌며 3·1운동 관련 강연)   배민수(‘국민회’라는 단체 만들어 독립운동하다가 체포)   신성구(1910년대 김헌식과 함께 독립운동)     송종익(도산 안창호와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 물질적으로 협조)     윤병구(이승만과 뉴욕 오이스터베이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루스벨트대통령 찾아가 청원서 제출)     윤헬렌(1921년 뉴욕 타운홀대회 참가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실정 전달)     이봉수(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   이병두(서재필 박사 도와 미주의 학생운동, 독립운동 주도)     이승만(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이원익(1919년 상해임시정부 요원)     임창영(뉴욕 한인들을 규합해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항의 시위)     임초(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작성한 3인 중 하나. 뉴욕 흥사단의 주요 인물)   정애경(3·1운동 당시 한국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상해로 탈출. 뉴욕한인교회 부인회 회장)     조병옥(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와 투옥. 흥사단 주요 인물)   한승인(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조병옥과 투옥.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한인학살 모면 후 일본의 만행 폭로)   허정(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보좌)     천세헌(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윤지혜 기자기록 타국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미주 독립운동

2024-08-14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샌프란시스코(상)] 탕…탕…탕…가난한 노동자 장인환·전명운, 3·1운동 불꽃을 심다

“내 나라 망하고 내 동족이 다 망한 후에 내가 살아 남는다면 어찌 두고두고 후한을 더 기다리리오. 그런고로 그(친일인사 스티븐스)를 쏜 터이니 다시 두 말 할 것 없노라.” 공장·농장 노동자들, 독립자금 모금 상항한인감리교회 매각돼 절로 사용 이대위 총회장, 이민사회 정신적 지주 약 16만 한인들을 대표하는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회관 강당에 전시된 장인환 의사 흉상 위에 걸려있는 그의 어록 중 일부다. 대한민국에서 약 9000km떨어진 샌프란시스코. 성 프란시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샌프란시스코는 1846년 멕시코령에서 미국에 편입됐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꼽히는 이 곳은 하와이와 함께 미주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지다. 샌프란시스코와 떼 놓을 수 없는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위시로 해외 독립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가 조직된 곳이며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인사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곳이다. 이번 샌프란시스코 특별 취재는 워싱턴 중앙일보와 한국언론진흥재단과의 공동기획으로 하와이에 이어 미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되돌아보기 위해 진행됐다. 박병호 전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회장, 권욱순 현 한인회장과 고현숙 한인회 부회장 등이 취재에 도움을 줬다. ◇장인환·전명운 의거, 3·1운동의 불씨 되다 1908년 3월 20일. 중절모를 깊이 눌러쓴 백인 신사가 투숙하려던 페어몬트 호텔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한인 노동자 4명이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녹을 받으면서 일본을 돕는 너는 우리의 원수다! 한국인은 일본 지배 아래서 행복하다는 망언을 하다니. 취소해라!” 기습공격을 당한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면서 사실상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을사늑약의 배후에 있던 스티븐슨이었다. 그를 때린 4명은 스티븐슨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한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 기자회견 내용이 샌프란시스코 유력 일간지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보도되면서 분개한 공립협회 회원들이었다. 사흘 뒤인 23일 오전 9시 10분쯤. 스티븐슨은 일본 정부와 한국 통감부의 특별 밀명을 띠고 워싱턴DC로 이동하기 위해 오클랜드까지 가는 페리 부두에 도착했다. 군중 속에서 한 젊은 한인 남성이 그에게 튀어 나와 품 속에 숨겼던 총을 꺼냈다. 당시 노무자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전명운(1884∼1947)이었다. 아뿔싸! 불발이었다. 급한 마음에 몸싸움을 시작했다. 탕! 탕! 탕! 또 다시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전명운과 몸 싸움을 벌이던 스티븐슨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두 발이 허리와 등을 명중했다. 저격자는 장인환(1876~1930)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슨은 병원에서 이틀 뒤 숨을 거뒀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출발해 샌프란시스코 공장 노무자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에 젊음을 바친 이 두 젊은이들의 의거는 한국 민족운동사상 첫 의열 투쟁으로 기록된 ‘상항의거’였다. 박병호 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은 “전명운, 장인환의 의거가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로 이어지면서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고 강조했다. 103년이 지난 의거 현장은 한 때 조국의 적을 암살했던 ‘비장한’ 곳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밝은 풍경이었다. 쾌청한 하늘, 눈부신 태양 아래 반짝이는 바다 위로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거나 커피를 즐기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기자와 동행한 권욱순 현 한인회장은 “지난 주 한인회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거 103주년 기념식을 치렀다”며 “샌프란시스코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기지 역할을 했던 의미 있는 곳이기에 다른 이민 사회와는 또 다른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본토 독립운동의 시초, 공립협회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한인들의 첫 이민생활이 시작된 즈음을 전후에 본토에도 한국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의 유입이 시작됐다. 미주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 유학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 땅을 밟은 것은 1902년 10월쯤이다. 1903년 한인 노동자 18명이 모여 설립된 공립협회는 친목단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들로 가난했지만 수입의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다.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도 공립협회 소속이었다. 한인단체들의 통합운동이 일어난 것은 스티븐스를 저격한 상항의거가 일어나면서부터다. 이를 통해 공립협회는 1909년 2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인 대한인 국민회가 탄생했다.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이 주축으로 활동했던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의 중앙총회와 북미,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4개 지방총회와 산하 116개 지방회로 조직 개편됐다. 1935년까지 자리를 지키던 국민회관은 베이 브릿지 건설로 철거돼 현재는 자취가 사라진 상태였다. 현재 LA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1938년 국민회가 LA로 이전해 사용한 건물로써 1970년대 한인 교회에 매각됐다가 2003년 기념관으로 복원됐다. ◇독립운동의 출발, 상항한인감리교회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샌프라시스코에서도 교회가 독립운동과 한인단체의 본부 역할을 했다. 1903년 9월 안창호 선생 등 이민자들은 집에서 예배를 열기 시작, 1906년 11월 18일 상항한인감리교회를 창립했다. 기자는 한인회 임원들과 1930년 6월 교회 창립 이래 처음으로 신축된 포웰 스트리트 선상의 교회 건물을 찾았다. 교통이 복잡한 차이나타운의 한 복판에 있었다. 스티븐슨이 암살되기 전 투숙했고, 한국 국빈들이 방문 시 묵는다는 페어몬트 호텔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이 옛 교회 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중국인들이 절로 사용 중이었다. 박병호 전 한인회장은 “교회가 신도수가 늘어나면서 큰 성전이 필요했기 때문에 2003년 지금의 주다 스트리트 성전으로 이전 신축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기존 건물이 독립운동과 이민 역사 유적지로 갖는 의미를 강조하면서 매각에 대한 반대여론도 컸다고 했다. “역사 유적지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쉽죠. 누구 하나라도 건물을 지키자면서 돈을 내놓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민사회의 아버지,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를 꼽으라면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제4대 목사인 이대위(1878-1928) 전 국민회 총회장이다. 1913년 국민회 총회장에 임명된 그는 50세 젊은 나이에 과로로 타계하기 전까지 민족운동에서부터 구석구석 한인사회를 돌보는 일까지 도맡은 인물이다. 한인 최초로 UC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언론인으로서 ‘대도’와 ‘신한민보’를 복간하여 주필로서 글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쳤다. “전명운, 장인환 의거 이후 전명운은 곧 석방됐지만 장인환은 사형수들만 가는 감옥에서 25년 징역형을 받았죠. 그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돈을 모은 장본인이 이대위 총회장입니다.” 이대위는 장인환을 면회할 때마다 감옥에서 받은 학대가 말할 수 없이 비참해 눈물이 난다며 장인한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끈질긴 법정 투쟁 끝에 불구가 될 정도로 감옥에서 몸이 상한 장인환은 1919년 감옥 생활 10년만에 가석방될 수 있었다. 이대위는 타계 후 이 지역 사이프레스 묘지에 묻혔으나 샌프란시스코 후세 한인들이 조직한 천장준비위원회와 국가 보훈처의 노력으로 2005년 10월 이대위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독립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천장위에서 일했던 박 전 회장은 “이대위 총회장은 이민사회의 참된 정신적인 지주이자 독립운동가, 성직자,교육가, 언론인이었다”며 “이승만은 외교, 안창호는 교육, 박용만은 군사력을 강조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면 이대위는 현실적으로 미주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해결사였다”고 했다. 이대위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했다. “독립을 위해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하는데 우리들이 철저히 배우고, 자유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힘을 길러야 하며, 단결된 힘으로 때를 기다리자. 그리고 기억하자. 못 잊어 금수강산 다시 찾는다.” ■미주 등 항일독립운동의 전개 1903년 1월 13일 갤릭호에 한인 이민자 102명 호놀룰루항 도착 1903년 11월 10일 최초의 미주 한인교회인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 설립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을 위시로 1903년 9월 22일 결성된 친목회를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재편한 공립협회 탄생. 1905년 11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설립됨.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스티븐스를 처단하면서 해외 첫 의열투쟁 불씨를 지핌. 1909년 2월 1일 하와이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가 통합해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통일단체인 국민회가 결성됨. 1909년 10월 25일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불씨로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1910년 2월 국민회에 하와이 전흥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합류하면서 명칭이 대한인 국민회로 바뀌며 조직이 확대 개편됨. 1919년 3월 1일 하와이에서도 3.1운동 기념식 열림 1919년 4월 17일 이승만을 국무총리고 하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됨. 1919년 4월 14~16일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을 중심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 1921년 7월 21일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동지회가 조직됨. 대한인 국민회와 반목과 협조를 거듭하면서 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섬.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해침공 전승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져 의열투쟁을 일으킴. 1940년 5월 9일 같은 해 4월 1일 중경의 김구 등이 설립한 한국 독립당을 후원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지부 설립.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한국 독립기원 시가행진 열림.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조국 광복 샌프란시스코=이성은 기자

2011-04-18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하와이 (하)] "차세대 비전 세우고 통일 준비해야할 때"

“이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교민들 전체가 ‘우리 것’이라는 역사의 뿌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호놀룰루의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김낙인 담임목사는 지난달 27일 그의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민 역사가 시작된 1903년. 그 해 11월 10일 한인들은 ‘한인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호놀룰루 시내 방을 빌려 예배를 갖기 시작했고 이 교회의 시초가 됐다. “사실상 해외 최초의 이민 교회라 할 수 있지요. 낮에도 밤에도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위해 일했던 이민 선조들에게 교회는 본부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한인기독교회를 세우기 전에는 이 교회를 다니셨었고요.” 키아우모쿠 스트리트 1639번지에 있는 이 교회는 1998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지은 새 성전이다. 교회 역사 자료실에는 당시 자료와 사진 등이 잘 보관돼 있었다. 교회측에 따르면 1970년대 말 출석 인원이 약 460여명이던 신도 수는 1988년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성인 중에서 700여명이 1세, 200여명은 2세입니다. 청소년과 어린이, 3~4세대까지 합치면 훨씬 많겠죠.” 4년 전 LA에서 이 곳으로 부임한 그는 “앞으로 교회와 한인사회가 함께 해 풀어야 할 과제는 차세대를 위한 비전을 세우고 남북통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하와이의 크리스천들이 이 교회에 모여 통일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졌다. 이 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한인사회학교와 경로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김 목사는 “과거 한국은 힘없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한인이라 하면 오히려 혜택이 되는 시대”라며 “우리 조상들의 나라에 대한 뿌리 교육을 위해 청소년 회관 건립 비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은 기자

2011-04-12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하와이 (하)] 이민 108년…과거엔 독립운동의 요람, 지금은 차세대 한인 뿌리교육 요람으로

'한류 열풍'으로 한국 연예인 팬클럽이 13개 한민족 알리기 '코리안 페스티벌' 매년 열여 “알로하!” 하와이어로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사랑합니다’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래서 하와이주의 또 다른 별명은 ‘알로하 스테이트’다. 미국에서 캘리포니아주와 함께 가장 아시안이 많은 곳으로 뽑히는 이 곳에서 한인 사회는 108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장해 왔다. 한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하와이 한인회의 김영해 회장과 최초의 이민 교회이자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맡고 있는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김낙인 담임목사는 “하와이의 다음 과제는 차세대 한인들에게 조국에 대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주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주 독립운동 요람이자 근거지 역할을 했던 하와이 한인사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호놀룰루 상권의 중심부인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고층 빌딩 4층의 한 사무실. 하와이 한인회가 조그맣게 사용하고 있는 한인회관이다. 회관 안에는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 옆에 각종 역사 자료가 담긴 책들과 앨범 등이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한인회를 이끌고 있는 김영해(사진) 회장은 “하와이 이민 역사가 뿌리 깊지만 아직까지 한인회관을 단독 건물에 마련하지 못했다”며 “1976년부터 한인 문화회관 건립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모은 건립기금은 약 160만 달러. “일본이나 필리핀 커뮤니티가 회관을 짓는데 들인 돈이 2000만 달러 정도는 됐죠. 우리도 이 정도 목표액을 잡고 있는데 우리 세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 기금이 모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차세대 뿌리 교육 “센서스에 따르면 전체 하와이 인구 140만 명 중 순수 한인 1세는 2만3000명 정도, 2세~4세까지 감안하면 한인 인구는 4만5000정도로 잡고 있죠. 앞으로 한인회 역할은 차세대에게 한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주고 한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하와이는 숫자가 적어 한국 정부에서 지원하는 한국학교는 없고 각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들이 전부라고 했다. “이민 초기 선조들은 잎이 전부 가시라서 살이 찢기기 일쑤인 파인애플 밭에서 일하고 받은 수입의 25%를 독립자금에 보탰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우리 뿌리만큼은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죠.” ◇한류의 중심지 아시안이 다수 민족인 하와이에서는 한류 바람이 막강했다. “하와이에 비, 정준호, 류시원 등 한국 연예인 팬클럽이 13개나 되요. 대부분 일본인인데 연령은 30,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고요.” 이들 팬클럽은 한류 연예인이 하와이를 방문하면 호텔 연회실 등을 빌려 파티를 열어주는 게 '기본'인데 한 번 모이면 보통이 200~300명이라고 했다. “한국 드라마를 한인보다 더 열심히 보는 하와이안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김치라 하면 한인을 비하하는 말 같았지만 한인사회에서 매년 여는 김치 먹기 대회에 지역 주민들이 우르르 참가하는 것을 보면 한류 파워를 실감합니다.” 현재 하와이 문화회관 건립위원의 한국 홍보대사는 배우 정준호가 맡고 있다. ◇관광 사업, 자영업 등 주요 한인 비즈니스 지상 최고의 파라다이스로 꼽히는 하와이에서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는 당연 관광 산업이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여행사도 다수. 특히 한국인 비자 면제 프로그램이 시행되면서 관광 특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 한인이 주력하는 비즈니스는 식품점, 식당, 주류 판매점, 미용실 등이며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으로 진출한 한인도 상당수였다. “하와이 기후 상 본토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여기는 세탁소가 잘 안됩니다. 입는 옷이 맨날 이런(물빨래가 쉬운) 옷들인데요." 1976년 9월 도미해 현재 떡 공장을 운영 중인 김 회장은 로컬 사회에서 한민족을 알리기 위한 행사로 매년 코리안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민 100주년 사업 이후 매년 7월 둘째 주 토요일마다 열고 있습니다. 9월에는 체육회가 여는 민속체전이 있고요. 한인만의 축제가 아닌 지역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라는 데 의미가 큽니다.” 이달로 임기가 끝나는 김 회장은 앞으로 한인사회가 긍정적으로 성장하는 비결은 "우리 문화를 지키고 알리고 즐기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독립운동이라는 목적 아래 국민회와 동지회가 한인 사회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한인회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간은 문화회관 건립위원회 임원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겠습니다.” 호놀룰루=이성은 기자

2011-04-12

"무지몽매해 나라 뺏겼다는 설움에 한인들 자녀교육은 사명이었죠"

“이민 선조들의 자녀교육이라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국민이 무지몽매해서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에 배워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라는 각오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지난달 24일 하와이 한인회관에서 만난 이민사 연구가 이덕희(사진)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연구위원이 말한다. 그는 올해로 70세지만 여전히 바쁜 이민사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화여대 재학시절인 1968년 도시계획 전문가가 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하와이 생활은 유학 시절 일본계 3세인 남편을 만나면서부터다. 한인 이민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호놀룰루시와 하와이 주정부에서 도시계획을 담당했던 공무원 재직시절. “도시계획을 하다 보니 다른 민족들이 이민역사를 기념하는 것을 보게 됐어요. 자연히 한인 이민사에도 관심을 갖게 됐죠.” 그는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하와이 동포의 한국 사회에 대한 기여’등의 저술을 주도하고 ‘한인기독교회 한인기독학원 대한인동지회’등 다수의 이민사 관련 책을 저술했다. 한인 이민 100주년 행사도 일선에서 진두 지휘했던 그는 부녀회의 활약을 강조했다. “1924년에 일본 사진신부들 틈에 껴 한인 사진신부 700명 정도가 오면서 부녀회는 1500명 정도로 시작됐어요. 반면 일본 부녀회는 2만 여명이나 됐지만 그룹 활동이 없었어요. 한인 부녀들은 교육회, 구제회, 영남 부인회 등 여러 개의 그룹을 조직했어요. 우리는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그는 초기 이민자들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우리 생각에 100년 전에 영어도 못하고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만 했으리라 생각 한다면 착각이에요. 지금의 우리보다 현명했고 나라를 위한 사랑이 있었고요. 1905년부터 신문을 발행했으니 당시 의식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나요?” 요즘의 한인단체들이 자발적인 자금모금보다는 한국 정부 등 다른 곳에 손을 벌리려는 태도가 있다며 지적했다. “인구 4500명 정도에서 애들 빼고 노동 인구는 2000명도 안 되는 숫자였어요. 그 땐 이미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태라 돌아갈 희망이 없었고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우리 손으로 회관을 지었습니다.” 이 연구가는 앞으로 다가올 110주년, 나아가 200주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110년 전과 지금 한국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경제 강국으로써 세계 주도를 해 나가는데 미주 한인 후손들이 어떻게 동참하느냐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는 “한민족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티즌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조국에 보훈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일본을 돕기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이 성금을 내는 것을 보면서 뿌듯했다”고 했다. 차세대들에게는 한인 동포사회에 머물지 말고 과감하게 주류 사회를 뚫고 경험과 인맥을 넓히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역설했다. “변호사가 됐다면 개인 사무실 개업보다는 큰 로펌이나 검사실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야 합니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로 운영을 잘하는 식당에서 밑바닥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의사도 큰 병원에 적을 두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성은 기자

2011-04-08

"한국말 못해도 한국은 내 안에 있어요", 독립운동가 안원규 선생 손녀…여성 최최 한인 판사 캐런 안

하와이 호놀룰루 다운타운에 있는 순회법원. 지난달 25일 오후 2시쯤 법원 2호실에는 한창 마약 밀매범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판사석에 앉은 한인으로 보이는 유일한 동양인. 미주 최초의 한인 여성 판사로 기록된 캐런 안(64·사진)판사가 눈에 들어왔다. 1994년 오하우섬 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던 그는 11년 동안 순회법원에서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범죄를 다루는 베테랑 판사다. 재판이 끝난 후 “강력범죄 사건만 다루면 힘들 것 같다”고 했더니 그가 씩하고 웃었다. “전혀요. 비극도 있지만 일 자체는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그의 집무실에는 한국 기념품 등 한 눈에도 한국적인 것들이 많았다. 한국 갈 때마다 사온 것들 이랬다. 안 판사는 작년 10월에도 타주 한인 법조인들과 함께 본국 대법원의 재외한인법조인 초청행사에 참석차 일주일 동안 한국을 방문했다. ◇독립운동가 3세 안 판사는 한인들의 지지단체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국민회를 조직하고 후에 총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안원규 선생(1878~1947)의 손녀다. 1903년 하와이에 온 안원규 선생은 사후인 1995년 건국훈장을 받고 1988년 본국의 해외선열 유해봉환 사업의 일환으로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셨어요. “저는 어렸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부모님께 들은 게 많아요. 양복점을 했던 할아버지는 기금을 모아 독립자금을 마련했고. 한국의 청년들이 사탕수수밭에 일하기 위해 올 때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고 다독이시면서 공짜 양복 한 벌씩 해 주셨어요.” -할아버지 유해환국 안장식에 참석하셨다고요. “할아버지가 기뻐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이 너무 행복했죠. 분골함을 들고 비행기에서 내렸죠. 장중하게 거행되는 안장식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한인 최초의 여성 판사 1946년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그는 보스턴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하와이로 돌아와 ‘애드버타이저’, ‘채널2’ 등에서 언론인으로 10여 년간 근무했다.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 공보실로 옮기면서 커리어를 쌓았다. -언론인에서 돌연 법대에 진학했네요. “백악관 시절 모든 이목은 유럽에 쏠렸었어요. 한 번은 태평양 인근 문제를 다루기 위한 별도의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국내 정책 관계자에 건의했더니 ‘너는 언론인인데 뭘 안다고 하냐’는 식의 답을 들었어요. 그 때 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법조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한국말 못해도 내 안에 한국 있다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요. “한인이라는 게 자랑스럽죠. 한국말은 잘 못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냥 간단히 말해서 한국은 제 안에 있어요.” -한인 후배들을 위한 조언?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결단력이 있어야 해요. 법조인이 되려면 성적도 잘 받아야 하고요. 운도 따라야 하지만 기회가 올 때 잡을 준비는 해야죠. 또 한가지, 현명해 지려면 여행을 많이 하세요.” ◇은퇴 후에는 사진작품 활동 하고 싶어 커리어를 쌓다 보니 평생 독신이 됐다는 안 판사는 세상과의 의사소통을 강조한다. 법조인이든 언론인이든 세상과 소통하는 일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은퇴 계획은요. “몇 년 뒤 이 법원에서 은퇴하겠죠? 사진을 찍으면서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니까.” -포토 저널리스트가 될 건가요? “하하! 전문직은 어렵겠죠. 그래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제 다음 인생의 막은 나 보다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더 찾을 겁니다.” 안 판사는 이틀 뒤 휴가를 내고 2주일 여 동안 쿠바로 출사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사진기와 녹음기, 펜을 가방에 챙기는 기자에게 말했다. “저도 한 때 기자였기 때문에 기자란 직업을 사랑합니다. 일만 하지 말고 하와이 구경도 많이 하고 가세요.” 이성은 기자

2011-04-08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하와이 (중)] 대법원장·연방판사…눈물의 씨앗으로 뿌린 하와이 후손들

수입 25% 독립자금 제공 부 축적할 여유조차 없어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동포가 어린이를 포함 7000명이 채 안된 상황에서 동포들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수입의 25%정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출판된 ‘하와이 동포의 한국 사회에 대한 기여(인하대학교 출판부)’라는 책의 한 대목이다. 1903년 미주 최초의 공식 이민지인 하와이에서 동포들은 사탕수수밭과 파인애플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해서 어렵게 모은 돈을 그렇게 썼다. ◇독립운동자금 대느라 포기한 ‘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운동은 대한인국민회, 구미위원부, 재미한족연합회 등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대한인국민총회에서 모금한 독립운동지원금인 혈성금 영수증 등 당시 자료들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이덕희 이민사 연구가는 “선조들은 부를 축적할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일본이 우리보다 이민이 약 20년 앞섰고 숫자적으로도 많았습니다. 중국은 1852년부터 와서 농장에 있었고 비즈니스를 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아요. 하루 벌어서, 한달 벌어서 번 돈의 반을 독립운동에 바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분열 강조보다는 과정 인정해야 “국민회 사람들은 대부분 감리교회를 나갔고, 이승만 박사는 동지회를 세우면서 기독교회를 세웠지만 서로가 적일까요? 갈라지는 걸까요? 옛날에 나눠졌다고 생각하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는 후에 이민 온 사람들의 잣대입니다.” 이 연구가는 하와이 한인사회가 국민회와 동지회를 주축으로 갈라졌다는 판단은 옳지 않다며 한국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저 역시 대학 때 독재정권 반대운동에 참가했었던 4·19세대였어요. 독재를 하고 부정 선거로 하야를 했다고 그 점만 부각하지 말고 나라를 세우기까지 어려운 시기를 끌어왔던 행적을 이해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1960년 일어난 4·19혁명으로 일주일 뒤인 26일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은 5월 29일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 누구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하와이 망명 항공편을 돌보지 않았다. 하와이 동포들과 하와이에 있던 미국인 지인들이 비행기 전세 비용 3만4000달러를 해결했다. 요양원에서 지낸 말년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국정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하와이 동포의 한국 사회에 대한 기여 중 제3장 조국의 주춧돌을 놓은 심정으로’) ◇눈물의 씨앗, 기쁨의 추수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는 성경 구절처럼 108년이 지난 하와이 한인 후손들은 ‘고진감래’의 열매를 누리고 있었다. 기자가 만난 하와이 한인들은 “나라 잃은 슬픔, 타향살이 설움에 힘겨운 노동에도 나라를 되찾고 자녀교육을 시키겠다는 선조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인 사회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해 하와이 한인회장은 “과거에는 한인들이 농장주 밑에서 노동을 했지만 지금은 작게라도 자기 비즈니스를 갖고 있는 사업주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특히 문대양 전 하와이주 대법원장은 하와이 이민사 성장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초기 사탕수수밭 노동자로서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고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를 모았던 조부모와 부모 밑에서 뼛속까지 한인으로 자란 그는 1993년 미국에서 한인 최초의 대법원장이 됐다. “해리 김 빅 아일랜드 하와이 카운티 시장, 7선에 성공한 실비아 장 루크 하와이주 하원의원 등 하와이에서 영향력 있는 한인 인물들이 꽤 많아요.” 그 외에도 사탕수수밭 노동자 후손이자 아시안 최초로 연방판사가 된 고 최영조(미국명 허버트 최 1916-2004)판사, 최초의 한인 여성 판사로 기록된 캐런 안 판사, 듀이 김 전 하와이대 커뮤니티 칼리지 총장, 한인 3세인 팻 하마모토 전 하와이주 교육국장 등 다수다. 사진신부였던 어머니가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재혼하면서 태어난 리 도나휴 전 호놀룰루시 경찰국장도 하와이 동포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한인으로 꼽혔다. 그는 1998년 경찰국장 발표 직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인 후손임을 가장 먼저 밝힌 한인 2세다. 호놀룰루=이성은 기자 협찬: 한국언론진흥재단

2011-04-08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하와이 (상)]"사탕수수밭서 피땀어린 돈 한두 푼 모아, 이역만리 조국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쳐"

이민 역사 1세기가 흐른 하와이 동포사회는 4만 5000여명의 한인 인구가 전체의 2%에도 못 미치는 소수 민족이지만 주대법원장, 주하원의원, 빅아일랜드 시장, 연방 판사, 호놀룰루 경찰국장 등 각계각층의 요직 인물을 배출해내며 ‘코리안 파워’를 입증했다. 첫 근대적 이민지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하와이. 이제 이곳 동포사회는 역사적 뿌리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의 110주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녀들, 독립자금 모금·자녀교육 열성 ◇호놀룰루항에 첫 발을 떼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북서쪽으로 약 4마일 거리에 있는 호놀룰루 항구. 햇볕이 내려 쬐는 가운데 부슬비가 내렸다. ‘호랑이가 장가를 가도 몇 번은 가겠군…’생각이 들 무렵 “비가 와도 바로 햇볕이 나는 이 날씨가 하와이의 매력”이라며 항구 안내원이 인사를 건넨다. 호놀룰루의 상징적 시계탑인 알로하 타워를 지나자 펼쳐진 호놀룰루 항구 전경.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첫 발을 디딘 바로 장소다. 한인 이민자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에 들러 신체검사를 받고 이중 102명이 갤릭호에 몸을 실었다. 보건 당국 심사를 통해 상륙허가를 받은 86명은 이 곳에서 기차를 타고 와이아루아(Waialua)농장과 모쿨레이아(Mokuleia)캠프로 이동했다. 본격적인 근대적 첫 이민은 그렇게 시작됐다. ◇“선조들 눈물 뿌린 사탕수수밭이 있었기에…” 오아후섬 북쪽 끝자락에 있는 폴리네이시안 민속촌에서 83번 도로 서쪽방면을 따라 99번 도로 남쪽방면을 타고 내려오는 길 양 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커피농장이 펼쳐진다. 더위를 식힐 만한 큰 나무 한 그루 조차 보이지 않는 이 대지가 지금은 사라진 사탕수수밭 자리다. 남미나 필리핀 등 가격이 저렴한 곳에서 수입하면서 사탕수수 농사는 과거의 한 페이지가 돼버렸다. 그나마 파인애플 농장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선조들의 피눈물이 베어 있는 곳이에요. 조국 떠난 그리움과 나라 잃은 설움에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가장 적은 품삯을 받아가며 그 힘든 노동을 했었죠.” 동행한 한인 가이드의 말이다. 1910년 4500여명에 이르던 한인들은 고달픈 노동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3000만 겨레를 돕기 위해 한 푼이라도 독립운동자금에 보태려고 했다. 하와이 이민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가 넘었다. 대부분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송금됐다. 동포들의 국권회복 운동에는 부녀들의 활약도 컸다. 이 중 상당수는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남편의 사진 한 장 보고 태평양을 건너 시집 온 약 800명의 이른바 사진신부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남편 여권 사진 한 장 보고 시집 온 10대 새 신부가 공항에 마중 나온 남편을 보고 시아버지라고 착각을 했대요. 실제로 나이차이도 10~20년씩 나는 것은 예사였고요. 나중에 남편이란 걸 알게 된 새 신부가 밤새 울었다는 이야기는 많아요. 그래도 한국 여성들 대단합니다. 남편 뒷바라지 하고 자원봉사 하면서 독립자금 모으고, 자녀 교육에는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요. 그런 선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국민회관 '독립문화원' 주민 반발에 정상 운영 어려워 ◇하와이에 펄럭이는 태극기, 한국독립문화원 호놀룰루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루크 애비뉴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한국독립문화원. 건물 앞 국기게양대에 달린 태극기와 성조기는 세찬 바람에 펄럭펄럭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걸요. 주택가라 주민들 반대가 심해서 정상 운영이 힘든 상황이거든요.” 문화원의 한미라 총무가 전화 너머로 아쉬워했다. 이 곳은 해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국민회가 1947년 회관을 옮겨 사용했던 한인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사지다. 국민회는 1914년 건립한 밀러스트리트의 회관이 주지사 관저가 확장되면서 헐리게 되면서 이 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문화원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국민회가 건물 유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한국 정부에 회관 기증을 제안하지만 IMF위기로 인한 사정으로 회관을 인수하지 못했다. 이 때 현재 문화원 이사장인 한국의 홍우준 경민학원 설립자가 2001년 국민회관을 인수, 이민 100주년을 맞은 2003년 1월 14일 한국독립기념관을 개관했다. 1980년 연방정부와 하와이 주정부에 역사보존지로 등록되기도 했다. 기자는 다음 날에야 문화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화원 안에는 독립운동 시절 당시 국민회가 사용했던 테이블과 의자 등에서부터 독립운동 전개, 하와이 이민 생활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수 백여 장의 사진들이 진열돼 있었다. 초기 이민자들이 사용했던 재봉틀과 피아노 등도 눈에 띄었다. 한 총무는 “홍우준 박사께서 민족교육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교육 이념으로 이 회관을 인수했는데 주민들의 반발과 운영비용 등 정상 운영에 어려운 점도 많다”며 “해외 독립운동사의 보고가 될 수 있는 이곳이 방치되지 않도록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뒤뜰에 세워진 무명애국지사 추모비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입의 십일조 등을 바치며 온 충성을 다하다가 눈을 감으신 무명의 애국지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기 추모비를 세운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으로 얼룩진 생황을 하면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충성한 한인 동포들을 기리는 겁니다.” 이승만, 100년전에 세계정세 꿰뚫어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39번지. 하와이와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18년 세운 한인기독교회 모습이 드러났다. 파란 기와지붕과 이승만 동상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 잡았다. “지난주 일요일(3월 20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을 기념해서 교회 신도들과 동지회 회원들이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하와이대 한국학센터의 이덕희 연구위원인 이덕희 이민사 연구가는 "이승만의 동지회가 국민회와 갈등도 있었지만 같은 목적 아래 접근 방법이 달랐던 것뿐"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회가 교민단으로 개편된 지 4개월 후인 7월 7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다. 국민회 주도권을 놓고 박용만과의 갈등도 주요 원인 중 하나. 동지회는 상하이 임시 정부를 옹호하고 외교주의론을 기본 노선으로 열강의 동의를 얻어 독립을 앞당기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저 역시 4.19세대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했던 사람이었어요. 연구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이승만 대통령이 성격적으로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지만 100년 전에 세계정세 국제관계를 훤히 뚫고 인물입니다. 하와이 동포 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은 지적하되 잘한 업적은 제대로 알자는 겁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은=신문산업의 발전과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으로, 한국언론재단·신문발전위원회·신문 유통원이 통합되어 2010년 2월 공식 출범했다. 2009년 7월 31일 개정된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9조를 근거로 설립된 공공기관으로, 신문 및 인터넷신문의 건전한 발전과 읽기 문화 확산, 신문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해외언론지원사업 대상으로 워싱턴 중앙일보 등을 지정, 기획취재 등을 후원하고 있다. 호놀룰루=이성은 기자 협찬: 한국언론진흥재단

2011-04-06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하와이 (상)] '코리안 파워' 하와이…새도약 110주년 준비

워싱턴 중앙일보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공동기획으로 ‘미주 독립운동·이민역사 현장을 가다’ 기획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첫편으로 하와이를 상, 하 두편으로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제주도 바람이 매섭다고 했던가. 지난달 22일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공항에 내리자 태평양 바다내음을 가득 머금은 세찬 바람이 첫 인사를 했다. 108년 전 한인 이민 선조 102명이 미국상선 갤릭호를 타고 긴 항해 끝에 밟은 이국만리 낯선 땅,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순간이다.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씩 고된 노동으로 모은 돈을 십시일반 모아 빼앗긴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한인 1세대가 뿌려 놓은 눈물과 땀의 결실일까. 숙소로 가는 동안 세계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와이키키 해변 인근에는 한글 간판이 달린 어엿한 상점들이 곳곳에 보였다. 본지는 미주 한인 이민역사와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고 앞으로의 동포사회가 가야 할 길을 점검해 보기 위해 1주일 동안 하와이 특별 취재를 했다. 이를 위해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했고 하와이 한인회와 하와이 한국독립문화원, 이덕희씨 등 다수의 하와이 이민사 연구가 등이 취재에 도움을 줬다.

201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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